절차탁마(切磋琢磨), 통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 기사입력 2008-05-26 13:27
[신동아]
#STEP1 통역사 되기로 결심하다
“엄마, 나 통역대학원 갈래.”
“응?”
“통역대학원 있잖아. 통역사 되려면 가야 하는 곳.”
“왜?”
나, 이수영은 멀쩡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 소리 들으며 상위권 대학 영문과에 진학했고, 빈틈없는 준비와 약간의 운으로 바늘구멍이라는 취업시장도 무난히 뚫었다. 사회생활 첫발을 디딘 곳은 외국계 기업 물류팀.
첫해까진 ‘해피’했다. 새로운 일상이 주는 기쁨과 배워야 할 일더미에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돈 버는 재미와 쓰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송장(送狀) 쓰고 전화 체크하고…. 화석화한 직장생활에 ‘원래 그런 거야’라는 위로도 언제부턴가 와 닿질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단순반복 업무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입사 2년차에 접어들 무렵. 매일아침 눈뜰 때마다 침대 밑으로 푹 꺼져 지구 밖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을 만큼 슬럼프가 심각해졌다. 그리고 오래전 마음속에 접어뒀던 꿈을 꺼내보았다.
동시통역사. 학부 시절 동시통역사 직업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직업군별로 성공한 선배들이 와서 직업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나는 이렇게 준비해서 불가능이란 산을 넘었다”는 유의 이야기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뭐 그런 자리였다. 초등학교 3, 4학년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내 영어실력은 유려하게 구사하기엔 약간 부담스러운 수준. 어려운 주제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영어를 잊지 않기 위해 꾸준히 ‘비즈니스 영어’ ‘고급영어회화’ 등의 수업을 들어왔다. 그런 내 마음을 잡아끈 건 국제무대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 인사의 소통을 책임지는 그 선배의 모습이었다.
“통역사는 연사가 말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청중, 또는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긴 대화 내용의 핵심을 뽑아내 외국어로 표현해야 하지요. 해당 분야 지식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늘 외국어실력을 되새김질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깨어 있는 직업입니다.”
그의 말이 달콤한 설득으로 다가와 ‘콩콩’ 심장을 울렸다. 회사생활과 공부를 병행할 것인가, 공부에 ‘올인’할 것인가. 부모님, 친구는 물론 어학원 강사, 선생 통역사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정말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리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때는 12월. 통역대학원 시험이 있는 내년 11월까지는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STEP2 “언어는 ‘철판’으로 하는 거야”
학원에 갔다. 최다 합격생수를 자랑하는 강남 S어학원이다. 수업을 듣기에 앞서 결정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았다. 어떤 통역대학원(통대)에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과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이 ‘투톱’이다. 1979년 국내 최초로 개원한 외대 통대는 그간 한영·한불·한독·한노·한서·한중·한일·한아 8개 학과 1800여 명의 통역사를 배출했다. 두 대학 외에 선문대와 서울외국어대에 통번역대학원이 개설돼 있지만, 규모와 역사에서 아직은 두 대학이 단연 선두를 달린다. 한영과의 경우 매년 15~20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 일단 학원 관계자와 상담을 하기로 한다.
“이화여대와 외대 입시 요강이 많이 다른가요?”
통역사는 연설 내용을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덧입히는 것은 금물이다.
“완전히 다릅니다. 일단 1차 시험에 외대는 단답형 문제가 출제돼요. 총 100문제가 나오는데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숙지하면서 준비해야 하지요. 독해, 한자, 문법, 띄어쓰기 등 한국어 시험도 치러야 하고요. 반면 이화여대 1차 시험은 영어 에세이예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영어로 논설문을 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2차 시험은 외대는 번역, 영어·한국어 에세이, 영어 구술시험 3가지가 포함되고, 이화여대는 한-영 순차통역 시험을 치러야 하지요. 외대 입시가 이화여대에 비해 다소 복잡하지만 본인의 특성과 강점을 고려해 판단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이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원래 이것저것 끼적이는 걸 좋아하는지라 메모리 위주의 문제보다 에세이의 매력이 컸다.
일단 ‘골인’을 위해 철저히 시험유형에 맞춰 준비하기로 한다.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고시(‘통역고시’라 치고)가 그렇듯 장수생이 되면 ‘고시 수렁’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소문처럼 떠도는 평균 준비기간은 1년8개월. 10개월 안에 ‘쇼부(승부)’를 본다는 계획을 잡고 전략을 짰다.
내가 공부해야 할 부분은 영한통역, 한영통역, 그리고 에세이. 긴 지문을 요약해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내가 구사해야 할 언어는 ‘막말’이 아닌 정제된 고급문장이다. 일단 6월까지는 단어, 문장, 구를 외워 어휘력을 늘리고, 8월까지는 한국어 뉴스 따라 읊기, 영어 연설문 외우기에 주력하기로 한다. 물론 영한, 한영통역 및 에세이 작성을 포함하는 학원 수업과 함께.
돌아온 수업시간. 학원 강사들 모두 통대 출신으로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다.
“이 수업은 영한 순차통역, 한영 순차통역, 문장구역까지 전방위로 이뤄집니다. 국내외 신문·잡지 등의 소스를 활용해 정치, 경제, 문화, 연예 등의 주제를 아우를 겁니다. 아시죠? 영어만 잘해서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는 거.”
수업은 발표 위주로 진행됐다. 지문을 듣고 난 뒤 바로 영어로 옮겨 발표해야 한다.
‘동물도 남을 의식할까. 동료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보고 듣는지 알까.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감정이입은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왔다. 남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감하는 능력은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며, 인간만이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다고 간주했다….’
강사가 읽어준 지문을 듣고 바로 영어로 옮겨야 했지만 나는 입 없는 사기주전자처럼 굳어버렸다. 받아쓰라면 일필휘지일 것 같은데…. 일단 ‘메모리 스팬(기억의 범위)’이 부족했다. 길게는 5분가량 되는 지문을 구성을 잡아 기억하는 훈련이 돼 있질 않았다. 여러 학생 앞에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버벅’댄 뒤 창피하고 발표가 부담스러워 학원가기가 꺼려질 만큼 절망했다. 책상에 코를 푹 박은 내게 강사가 한마디 던졌다.
“언어는 ‘철판’으로 하는 거야.”
#STEP3 정년과 차별 없는 ‘전문직 프리랜서’를 향해
학원 수강생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며 틈틈이 수업을 듣는 사람,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접었다 재기를 꿈꾸는 사람, 대학 학부생 등등. 외국어, 경영, 이공계, 음악 등 전공도 각각이다. 연령대도 종잡을 수 없지만 직장 경험이 있는 20대 후반, 30대 초반 학생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어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영어공부를 해왔다는 것.
또 학원생 대부분이 여성이다. 일전에 언어학을 전공한 교수가 “음성학상 여성과 남성의 높이가 다른데 흡수범위가 여자 쪽이 크다. 즉, 생물학적으로 언어감각이 좋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들이 공들여 쌓은 저마다의 기반을 접고 ‘통대입시반’을 택한 건 프리랜서, 전문직 고소득, 여성 위주로 돌아가는 분위기, 그리고 정년이 없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다.
두어 번 시험에 떨어지고도 마음을 추슬러 재도전하는 이도 많다. 학원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 영주도 재수생이다.
통역사는 철저히 실력으로 평가받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여성에게 인기가 높다.
“졸업하고 1년 동안 백수생활하면서 준비했는데 1차 시험에서 떨어진 거야. 집에서는 반대했지. 사법고시도 아닌데 뭘 2년씩 시간을 들이냐고.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던 차에 학원을 찾았어. 여전히 이어폰 귀에 꽂고 공부하는 사람들과 ‘한번 더 하면 붙을 수 있다’는 강사의 말에 힘을 얻어 다시 도전하게 됐지.”
영어 실력이 탄탄하고 평소 박학다식한 사람들은 더러 수개월 만에 붙기도 한다. 출발점이 다르기에 준비기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법학을 전공한 친구는 작년에 학원에 얼굴 몇 번 비추는가 싶더니 합격했더라.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나와 영어가 유창하거든. 한국어, 영어 모두 언어능력이 탁월하고 평소 책을 많이 읽으면 시험 유형만 익혀도 합격하기가 수월한가봐”라고 영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지만 네이티브라도 한국어가 부실하면 좋은 성적을 받기 힘들다. 특히 외대는 한국어 시험과 한국어 에세이 시험이 있기에 더 그렇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번 창피당하고 혼나던 수업과 스터디 6개로 굴러온 10개월의 세월이 머릿속에서 활동사진처럼 넘어갔다. 무엇보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심정적으로 의지가 됐던 건 ‘스파(스터디 파트너)’들이다. 통대 공부는 한 사람이 연사가 돼 지문을 읽고, 한 사람이 다른 언어로 통역하며 서로 실력을 평가해주는 형식이라 스파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또 논리, 문법, 어휘, 시제, 한국어 등 스터디 멤버마다 장점이 달라 서로 보완되는 부분이 크다.
드디어 시험. 1차 에세이 시험 주제는 ‘KBS 시청료 강제 징수에 대한 찬반론’. 오만 가지 주제로 에세이를 연습했지만 하필이면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주제다. 그래도 논리가 중요하다는 조언을 위로 삼아 꼼꼼히 적어내려 갔다. 1차 에세이 시험을 잘 못 봤다는 생각에 2차 시험까지 남은 1주일 동안 좌불안석으로 지냈다. 틈틈이 스파들과 시험대형으로 앉아 ‘아이컨택트’를 연습하며 대비했다. 실제 상황에서는 긴장돼 단순한 언어만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언어는 간단하게 사용하되 퍼포먼스를 살리는 쪽으로 전략을 짰다.
아무래도 구술시험을 망친 것 같다. 발표까지 흰 약처럼 쓰디쓴 시간을 견디던 중 예상외로 낭보가 날아들었다. 합격이다. 야호!
#STEP4 팔방미인이 돼야 하는 이유
한영 통역학과 입학생 총 33명은 10여 명씩 세 반으로 나뉜다. 일정한 입학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고 매해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이화여대는 20~40명, 외대는 40~50명(한영과 기준)을 선발한다. 이화여대는 통역과와 번역과를 나눠 선발하는 데 비해 외대는 1학년 말 시험을 통해 국제회의통역(동시통역) 전공과 번역·순차통역 전공으로 나눈다.
대부분 동시통역과에 진학하길 바라지만 시험이 까다로워 국제회의통역과와 번역·순차통역과에 가는 비율이 4:6 정도 된다. 외대에는 1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한다고 한다. 까다로운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당해에 졸업하는 비율은 양교 모두 40~50%. 시험에 떨어지면 수료자로 남거나 이대는 졸업 후 2년, 외대는 3년까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반 분위기가 2년을 좌우한다. 서로 독려하며 건강한 경쟁을 하는 반은 다 함께 졸업시험에서 웃고, 그렇지 못한 반은 함께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사이좋게 지내라.”
교수들이 늘 강조하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시간에 자기 실력을 드러내 보이며 평가받다 보면 그 스트레스가 동기들을 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2년 동안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졸업할 즈음에는 자매같이 되어버린다. 한중과 3학기에 재학 중인 친구 경은이는 “특히 프리랜서로 나가 필드에서 활동할 때는 일을 알음알음 넘겨주고 소개하는 시스템이라 동기인맥은 더없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입학 후 한 달은 그야말로 아마존 정글이었다. 학원 다닐 때는 합격을 위한 공부만 하면 됐지만, 이곳에는 ‘상한선’이 없다. 도망갈 구멍도 없고 적당히 실력을 포장할 수도 없다. 론치(launch)를 라운치로 발음하는 정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디테일까지 완벽해야 한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잊고 있던 “학원 다닐 때보다 공부량이 엄청날 것”이라는 선배들의 으름장을 아프게 되새겨야 했다. 밤낮없이 영어, 통역 스킬, 상식 3가지를 동시에 연마하는 치열한 일상이 시작됐다.
통역사들은 “한일 문제 등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는 어감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더욱 긴장한다”고 말한다.
1학년 수업은 순차통역, 통번역입문, 지역입문의 공통과목과 토론, 작문, 문장구역 중 1가지를 선택해 들어야 한다.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지만 그 가운데 상식이 특히 신경 쓰인다. 여러 언어가 섞여 통용되는 유럽 국가의 경우에는 한 분야만 전문으로 해도 통역사 활동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 모국어인 A언어,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가 가능한 B언어, 능동적으로 구사할 순 없지만 이해가 가능한 C언어 3가지를 함께 하는 통역사가 많은 이유다. 그러나 수요가 적은 우리나라는 한 분야만 특화해서는 사실상 일거리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경제연구소 주간보고서, 위내시경학, 초파리유전자 등 우주를 넘나드는 모든 주제를 아울러야 한다. “총리 통역을 하려면 총리 아이큐는 돼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렇게 배경상식을 탄탄히 하기 위한 수업이 영미지역입문이다. 중국 왕조, 축구, 물리, 수학 등 33개 주제를 한 학생이 맡아 영어로 발표해야 한다. 예컨대 야구라면 그에서 비롯된 용어들, 선수 이름, 야구 규칙 등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정리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과목으로 외대는 주제특강을 통해 경제, 금융, 법률, 생물,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의 지도적 인사를 초빙해 직업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해당 분야에 대한 견문을 넓히게 하고 있다.
순차통역 수업. 책상 위에는 빈 연습장만이 우두커니 주인을 노려보고 있다. “자, 시작한다”는 교수의 말에 모두들 ‘각’을 잡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순차통역 시간엔 연사가 읽어주는 텍스트를 곧바로 영어로 옮기는 반면 동시통역은 각자 부스에 들어가 동시에 테이프에 녹음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The former President gave an unprompted and error-filled defence of Hillary Clinton´s false claim that she had landed under fire in Bosnia during a 1996 visit, just as the damaging issue was dying down….’
모두 연사의 발표를 들으며 손으로 빠르게 기호를 적어내려갔다. 예컨대 ‘지원하다’는 의미를 살려 ‘ ’, ‘인수합병’은 company가 결합한다는 의미로 ‘ ’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내려오는 기호 족보가 있지만 정해진 규칙은 없다. 한글, 영어 상관없이 clue(실마리)가 되는 나만의 기호라면 무엇이든 좋다.
#STEP5 나 영어 잘하는 줄 알았는데… ㅠㅠ
“미국 정치에 대한 상식이 있다면 이해가 빨랐을 거예요. 참, 기록할 때는 모르는 부분이 나와도 몸짓을 의연하게 가지세요. 여러분처럼 고개 갸우뚱하고 볼펜 빙빙 돌리며 ‘잘 모르겠다’는 티를 내면 청중도, 연사도 불안해져요. 자, 이수영씨가 한번 통역해보죠.”
우리나라 동시통역사 1세대 임혜진 교수님. 평소엔 더없이 인자하지만 강의할 땐 잘 벼린 칼날같이 매서운 분이다.
“음…전직 대통령이 음…자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잘못된 주장에 방어를 했는데….”
이런, 학원 다닐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열심히 적은 기호들은 A4 용지 기준 한 페이지가량 되는 내용을 기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발표 뒤 이어지는 ‘크리틱(critique)’ 시간.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가만히 ‘처단’을 기다렸다.
“pause(멈추는 부분)가 너무 많았어요. 빠진 내용도 많았고요.”
“과감하게 세부 내용은 빼고 주요 내용만 짚은 건 좋았어요. 그런데 뉘앙스가 잘 안 살았어요.”
“일부 단어가 어색했어요. ‘종속자’는 ‘포로’로, ‘외부인’은 ‘이방인’으로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요.”
한바탕 학생들의 크리틱이 지나간 뒤 교수님께서 한마디하셨다.
“방금 네가 한 건 통역이 아니라 떡이다.”
순간 교실 전체에 ‘쌩’ 찬바람이 스쳤다. 핑 돌던 눈물도 기가 눌려 쏙 들어가버렸다. ‘떡’의 후유증은 컸다.
최정화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교수(왼쪽)와 배유정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 최 교수는 ‘국내 1호 박사 통역사’로, 배 교수는 만능 엔터테이너 통역사로 유명하다.
지난해 한일과를 졸업한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수년을 일본에서 지내 일본어가 유창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난 내가 네이티븐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어디 가서 네이티브라는 말을 절대 못 해.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모르는 표현, 단어, 구문이 너무 많은 거야. 한국말도 달리는 것 같고.”
우울한 마음에 동기들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학원 시절부터 스터디를 같이 하던 드림팀이다.
아기 엄마 세미 언니 : 수영아, ‘떡’ 얘기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실력 우린 다 아니까.
동갑내기 친구 희정 : 그래, 그 말씀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던진 경고 메시지일 거야. 초기에 군기 잡자는 의도로. “수업을 듣다 보면 본인 언어 실력에 무너지게 되는데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예방주사 놓던 교수들 얘기, 이제 이해가 간다.
나 : 준비할 때는 하고 싶은 공부 한다는 기분에 막막하지만 즐거웠는데, 지금은 툭하면 입에서 ‘힘들다’ ‘죽겠다’는 말이 나와. 꼴찌 된 기분, 바보 된 기분, 창피한 기분…. 유급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들고. 통대는 왜 왔을까….
희정 : 음. 그래도 차차 적응하고 다 졸업들 하잖아. 난 통역 자체가 좋더라고. 내가 누군가의 소통을 책임진다는 거.
세미 언니 : 통대 나오면 그게 하나의 전문자격증이 될 것 같아서 왔어, 난. 사실 요즘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잖아. 그런데 통역사가 꿈이 아니라면 굳이 통대를 올 필요는 없는 것 같아. 통대 수업은 언어보다 통역 스킬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발음, 문법을 바로잡아주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고. 그런 수업 시스템을 감수할 마음이라면 통대만큼 하나의 언어를 깊고 넓게 마스터할 수 있는 곳도 없지.
일상이라는 자전거는 자괴감을 바퀴 삼아 그렇게 굴러갔다. 매일 순차와 동시통역 스터디 하랴 수업준비 하랴, 하루가 짧다. 스파는 순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각자 애용하는 표현이 달라 교류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STEP6 느린 걸음으로
“지금은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게 힘들지라도 현장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부분이에요. 통역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노출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현장에서 자기 실력을 청중에게, 연사에게 바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학교와 동기와 선생들을 충분히 활용하세요.”
교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을 꿰뚫는 것 같다. 괴롭거나 지치거나 휴학하고 싶거나…심사(心思)가 새로운 페이지에 접어들 때면 힘이 되는 한마디를 무심하게 툭, 던져놓는다. 이런 위안이라면 ‘떡’이라는 소리는 몇 번이고 들을 수 있다.
수업은 보통 교수들이 진행한 기업, 관공서 등의 통역 자료를 활용한다. 배경지식 외에 분야별 트렌드, 예컨대 한일관계의 최근 흐름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자료가 도움이 된다. 이따금 들려주는 “영어를 영어로 재구성해 옮겼다”거나 “마이크를 끈 채 통역했다”는 등의 실수담, 그리고 퍼포먼스와 미팅 때의 에티켓 같은 경험담도 현장감각을 익히는 데 더없이 좋다.
수업 중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충분히 고민하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예컨대 나열되는 예문이 많을 때는 묶어서 처리할 것인지, 대표적인 한 가지만 얘기할 것인지, 구조는 어떻게 잡고 시제는 무엇으로 통일할 것인지 등을 잡고 들어가야 통역할 때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어느덧 1년. 구조가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논리력도 향상되는 것 같다. 방학 때도 통번역 아르바이트다, 스터디다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었다. 발표도 예전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해졌다. 지식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올림픽 최초 여성 참가자’ 따위의 주제로 동기들과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다반사니 관심사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흘려버리던 이야기들을 분석적으로 듣고 머릿속으로 가지를 쳐 내 언어로 표현하는 습관도 생겼다.
“프리랜서는 사실 인증시험(졸업생은 물론 현역 통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으로, 합격자수가 극히 미미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다)에 통과하지 않은 이상 졸업 후 바로 뛰어들기는 힘들어. 오랫동안 활동해온 기존 통역사들한테 일이 돌아가니까. 또 욕심에 덜컥 일을 받아도 곤란해.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인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길이 막히는 수가 있거든. 그러니 프리랜서 진입은 조심하는 게 좋아.”
오늘은 한불과 출신으로 외교통상부 서유럽과에 근무하는(3등서기관) 고등학교 선배 주연 언니를 만났다. 슬슬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 오늘 날 잡고 궁금한 것들을 다 물어보기로 한다. 통역사는 프리랜서 통역사, 관공서 또는 기업 소속으로 일하는 ‘인하우스(in-house)’ 통역사,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일하는 프로젝트 통역사로 나뉜다.
규모가 큰 국제회의 통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언어 분야에서 경력은 물론 실력을 인정받은 스타급 통역사들만 가능하다. 특히 서유진 교수님처럼 회의 진행과 통역이 모두 가능한 분들은 러브콜이 빗발친다고 한다. 인하우스 통역은 회사에 속해 통역일 외에 마케팅, 사무 등 다른 업무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 통역사는 주로 6개월, 1년 등 해당 회사가 통역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계약직으로 일한다. 프리랜서와 프로젝트의 경우 일이 몰릴 땐 몰리지만 일이 없을 땐 기약 없이 놀아야 하기에 불안정하다.
통번역 에이전시는 규모와 업무가 영세해 통대 출신이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프리랜서 일은 일을 맡다 보면 또 들어오고, 그러다 일이 겹치면 지인에게 소개하는 식으로 돌아간다. 보수는 프리랜서의 경우 요율이 하루 6시간 기준 80만원, 인하우스나 프로젝트의 경우 월 400만원 이상은 된다. 관공서는 대우가 이보다 못하지만 중요 인물의 통역을 맡을 수 있고 경력과 인맥을 쌓는 데 도움이 되기에 인기가 좋다.
“취업시장 전반이 힘든 만큼 통역사도 예전만은 못하지. 옛날에는 입도선매할 정도였다고 하잖아. 지금은 동시통역 시장은 제한돼 있고 기업들은 점차 순차통역을 선호하는 추세라 그냥 영어 잘하는 직원들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특히 영어과는 수요가 괜찮은 편이지만 불어, 중국어 등 다른 언어는 자리가 많지 않아 더 힘들지.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나처럼 다른 사무를 보면서 통역도 같이 하는 이가 많아. 일단 언어가 되면 주요 업무를 도맡을 수 있어 회사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 또 전혀 무관한 직업군으로 가기도 하지. 한영과 나온 지영이는 애널리스트로 갔고 또 누구 하나는 언론사에 갔고 일반 경영직으로도 가고. 일반 신입사원보다 좋은 대우로 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취업이 안 되서 학원 강의나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일반 대졸 대우로 취직하는 경우도 많거든.”
안정감 있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 기관에 소속되기를 택했다는 주연 언니는 “통역사는 다양하게 커리어패스를 관리할 수 있으니 찬찬히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STEP7 통역사로 산다는 것
다행히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은행 한 군데로부터 최종 합격소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분야가 다양하지만 금융에 관심이 있어 이쪽으로 특화하고 싶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초보 통역사로 다시 시작하는 사회생활이라 두 배는 더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 처음의 중요함을 잘 알기에 여유가 있어도 좀체 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1주일에 4번씩 스터디를 이어가고 있다. 그 옛날 학원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싱숭생숭한 마음에 존경하는 이영경 교수님을 찾아뵙기로 한다. 20년 동안 무려 1000여 회의 국제회의를 진행한 베테랑이다. 교수님 얼굴을 마주 하고 “다 잘될 거야”라는 말 한마디를 들으면 마법처럼 근심걱정이 달아날 게 분명하다.
“통역사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하니?”
“네, 그럼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아직 통역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많아. 힘들게 준비해서 멋들어지게 통역을 마쳐도 그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노고를 몰라줄 때도 많고. 하지만 난 언젠가, 곧 통역사가 ‘사’자 대열 직업에 오를 거라 생각해. 지금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말이야. 조선시대 중인인 의관, 율관, 산관이 지금의 의사, 법조인, 회계사, 즉 ‘현대의 귀족’이잖아. 그 가운데 하나인 역관이 지금의 통역사야. 자부심을 가지라는 얘기야.”
사실 한국에 통역사가 활동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9년 개원한 외대 통대가 1980년대 초부터 통역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외환위기 이후 외국 기업과의 프로젝트가 늘면서 통역시장이 커졌다. 특히 1991년 걸프전 때 CNN 생중계를 동시통역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통역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많을 거야. 수업 때 모의 동시·순차통역을 해봐서 알겠지만 순간의 판단력, 집중력, 순발력이 중요하거든. 계속 회의가 이어지는 정부 통역의 경우에는 3일 내내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계속 말해야 할 때도 있고. 또 끊임없이 변하는 경제와 국제정세, 속속 등장하는 신제품 등 공부도 계속해야 하지. 훗날 프리랜서가 돼서 수많은 통역사를 제치고 일을 따려면 국내는 물론 외신도 꼼꼼하게 모니터링하고 언어감각도 현상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해.
그렇게 경력이 쌓이면 전문분야가 생기는 날이 와. 너도 금융권 통역을 하면서 고급 정보를 접하다 보면 그 분야 통으로 성장해 다른 커리어를 가질 수도 있을 거고. 일본과 유럽에는 할머니 통역사도 많은 거 알지? 정년이란 게 없으니 길을 가며 계속 고민해도 좋아.”
“교수님, 일하면서 가장 힘들 때와 보람 있을 때는요?”
“북미회담, 6자회담, 북한대표 통역 등 내가 역사의 현장에 있다고 느껴질 때. 신제품 설명하며 시대 흐름을 먼저 아는 등 최신 정보에 근접해 있다는 기분도 좋고. 힘든 건 체력적인 부분도 있지만, 준비를 잘해도 연사의 발음이 이상하거나 속사포라서 통역이 엉망이 될 때, 그럴 때 제일 속상하지.
그나저나 통역사도 ‘끼’가 중요해. 컨디션, 신체조건,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통역 내용이 달라지지. 연사와의 궁합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야. 잘 맞아서 신들린 것처럼 통역이 잘되는 날이 있어. 또 끼를 타고난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만 3년은 지나야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서 실력을 측정할 수 있으니 이른 포기는 금물이야.”
교수님은 1980년대 중반, 막 통역사가 활동하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처음에는 못 미더워하다 한번 시켜보니 외국 클라이언트들이 만족을 표해 의학, 치의학, 금융, IT로 점차 분야를 넓혀갔다는 얘기, 일본어의 경우 당시 경제·사회적 책임 큰 어르신들은 대부분 일어를 조금씩 해 어설픈 실력으로 부스로 찾아와 “틀렸다”며 따지곤 했다는 얘기, 유럽에서 북한 통역사를 만나 반가운 한편 신기했다는 얘기들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기반에 감사하는 마음을 아로새기게끔 했다. 해 질 녘, 교수님과 나는 “곧 동료 통역사로 필드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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